'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라는 말은 커다란 은혜를 입었음에 감사하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문장을 곰곰히 곱씹어 보면 입은 은혜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을 넘어 은혜를 배푼 자와 끈임없이 이어지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것 같기도 합니다.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은 '측정할 수 없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측정을 할 수 없는 까닭은 은혜의 크기가 거대하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은혜를 측정하는 것 자체를 부단히 거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갚을 길이 없는 한(측정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옛 농경사회의 '품앗이'라는 문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합리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가정과 가정 사이에서 똑같은 능률을 가진 사람을 똑같은 머릿수로 교환할 수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이쪽에서 일을 도우러 '약관의 나이에 건장한 아들 둘'을 보냈다 해도, 이듬해 저쪽에서 반드시 똑같은 '약관의 나이에 건장한 아들 둘'을 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똑같은 능률을 교환하지는 못해도 도우러 온 아들들을 배불리 먹이고, 술이나 옷감을 보내 고마운 마음을 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짐작으로 계산되는 교환은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어긋남은 상대에게 잔금을 남겨 놓게 됩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해 받은 상대는 또 다시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교환을 할 수록 서로는 계속해서 상대에게 치르지 못한 잔금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 내부에서도 비슷한 교환의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돈을 벌 능력이 있는 가장은 노동을 하고, 돈이 필요한 자식들은 분배를 받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사회 모델처럼 말입니다. 아이는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면제받고 부모의 돌봄을 제공 받습니다. 물론 부모는 아이가 건강하게 크는 것 이외에 다른 댓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참으로 불균형한 거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꾸만 잔금이 남는 교환이나 댓가를 바라지 않는 돌봄을 '비합리적이다' 혹은 '불평등하다'고만 단언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태생부터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과정을 거쳐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무리를 유지하는 일에도 때로는 '비합리적'이거나 '불평등한' 불편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태도로만은 표현하기 힘든 이러한 프로세스를 그저 상생을 위해 서로가 연결되기를 원하는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라 해두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이고, 또한 이해하기 편할 것입니다.
'거래관계'라는 것은 측정이 가능해야만 성립됩니다. 값을 지불하는 순간 화폐의 가치가 측정이 불가하거나 시시각각 변동된다면 거래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교환하는 가치가 어긋나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연속적인 아날로그 신호가 디지털적인 데이터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표본화과정'과 '양자화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흐르는 시간을 정지시키고 무한한 연속성에서 몇개의 특징만을 분리해 측정가능한 상태를 만드는 것은 거래의 방정식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거래에서 우리는 '측정가능'하고 '갚을 길이 있다'는 전제의 설립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것을 '측정가능'하고 '갚을 길이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거래는 사람과의 관계마저도 깔끔하게 끝맺고, 단절시킬 수 있게 만들어 버립니다. 측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잣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분절되어 버릴 뿐이니까요.
' 제품/서비스 입장에서 SW가 성공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공한 제품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문제점 한가지를 해결한 것입니다. 구글은 '알고 싶다', 아마존은 '사고 싶다', 페이스북은 '친하고 싶다', 트위터는 '말하고 싶다'는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해결하는 고통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서비스는 더 크게 성공합니다. 구글이 해결한 '알고 싶다'의 문제의 깊이와 현재 구글의 300조 주식 가치는 정확히 비례합니다. 아마도 트위터가 절대로 구글보다 커질 수 없는 이유는 '말하고 싶다'는 본능이 '알고 싶다'는 욕구보다 더 작기 때문일 것입니다. '
구글의 '알고 싶다', 트위터의 '말하고 싶다', 아마존의 '사고 싶다', 페이스북의 '친하고 싶다' 등 거대 기업들이 해결하고 있는 '공통된 문제'들을 하나의 '공통된 문제'로 다시 엮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자에 대해 '알고 싶고', 타자에 대해 '말하고 싶고', 타자와 '친하고 싶고', 타자에게 무언가를 '사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앞선 문제들이 갖는 공통된 문제일 것입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저마다 나눠서 해결하고 있는 문제들은 결국 타자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구와 합치합니다. 하지만 기업 차원의 니즈 충족에 사용되는 거래 관계로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 분명 한계가 존재할 것입니다. 애초에 거래관계는 단절시키는 일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연결의 유효성을 보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 깔끔함이 어떻게 보면 위험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연결되고 싶다’라는 공통된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거래 관계에서 조금은 벗어나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결코 단절되지 않는 연결과 연대라는 것은 스스로가 측정하기를 거부하는 순간에만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는 쉽게 종료되지 않습니다. 측정하지 않으며 매듭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측정하지 않음'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래관계의 단순함은 삶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도 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함은 명쾌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생활세계에서 마주하는 자연과 사람, 여러 가치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오히려 너무도 복잡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복잡함에 '연결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복잡함을 우리는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는 너무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타인'을 원하곤 합니다. 끝없이 도움을 주고 싶어하며, 또한 도움을 받고 싶어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아날로그에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아날로그를 품기엔 녹록치 않은 형편에 마지못해 디지털을 수용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억압 되고 있는 아날로그는 불쑥불쑥 틈을 뚫고 새어나오곤 합니다. 그렇게 잠깐의 해방을 맞은 아날로그는 우리를 끝없는 심연에 내려 놓기도 하고, 한없는 기쁨에 올려 놓기도 합니다. '갚을 길이 없는 세계’, '측정할 수 없는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은혜를 입는, 도움을 주고 받는 세계를 우리는 이미 경험해 왔습니다. 형편이 좀 나아져 한숨 돌릴만 하다면 억압된 아날로그를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줘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비록 단절과 분절에 익숙해져 왔을지라도 우리는 심연안에서도, 기쁨안에서도 그러한 터무니없이 복잡한 세계에 '연결 되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아무래도 아날로그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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